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,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.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관산성 전투 (문단 편집) == 영향 == 관산성 전투와 후속 전투를 통해 신라는 한반도 [[중부 지방]], 특히 한강 유역을 확고하게 차지했고, 이후 삼국 구도에서 주도적인 위치를 차지하게 된다. 반대로 백제는 나라 전체가 휘청거릴 정도로 엄청난 타격을 받았다. 이때 입은 피해는 [[임진왜란]] 당시의 [[칠천량 해전]]에 비견될 정도. 성왕의 뒤를 이어 즉위한 위덕왕은 남은 역량을 쥐어짜 계속 신라를 공격했으나 별 소득을 거두지 못했고, 이후 백제는 [[무왕(백제)|무왕]]이 즉위하기 전까지 단 한번도 반격을 시도하지 못했다. [[나제동맹]]은 관산성 전투를 기점으로 완벽하게 파탄났으며 이후 약 100여년 간의 분쟁이 지속되면서 백제와 신라는 다시는 우호 관계를 구축하지 못했다.[* 왕을 포함한 고위귀족들이 상당수 전사함으로 백제의 지배층은 신라를 불구대천의 원수로 생각하게 되었고 서로 원한을 주고 받는게 반복되게 된다. 그리고 이런 인식은 후대에도 뿌리박혀 후삼국시대에 [[후백제|백제]]를 자처한 [[견훤]]은 서라벌을 점령했을 때 경애왕을 자결시키고 서라벌을 불바다로 만들어 버렸다.] 또한 태자 [[위덕왕|부여창]]이 왕위를 계승하는 과정에서 [[출가]] 해프닝이 일어나는 등 왕가의 권위 또한 크게 떨어졌다. 이 권위 하락은 일시적인 문제가 아니었다. 위례성을 빼앗긴 뒤 한동안 위태롭던 백제의 부여씨 왕권을 성왕이 다시 세워 놨으나, 이 패배로 인해 왕권 강화는 도로아미타불이 되고 [[대성팔족]]을 비롯한 귀족 세력이 대두하게 되었다. 이로 인해 왕가와 귀족들의 대립은 계속되었으며, 이는 백제가 망할 때까지 해결되지 못하며 간접적으로 백제 멸망의 원인이 되기까지 했다. 거기다 [[성왕(백제)|성왕]]이 [[왜]]와 손을 잡고 적극적으로 진행했던 가야에 대한 포섭도 이 전투 한방으로 물거품 되었다. 2차례의 [[사비회의]]와 [[안라회의]]로 [[가야]]를 [[백제]]의 영향력에 완벽히 들어오게 할 뻔 했으나, [[성왕]]이 죽고 백제의 정치가 혼란에 빠지면서 가야를 지켜줄수 있는 역량 자체가 되지 못했고 그 결과 신라는 관산성 전투 이후 주도권을 잡아서 백제의 후원으로 근근히 버티던 [[가야]]를 562년에 [[가야멸망전|완전히 합병했다]].[* 섬진강 유역은 백제가 차지하였다.] 곧이어 북쪽으로 진출해 오늘날의 [[함경도]]까지 북진하면서 전성기를 구가하게 된다. 그리고 새로 차지한 [[황해]] 연안의 [[항구도시]]를 통해 백제나 고구려의 방해 없이 [[중국]]과 직접 교류할 수 있게 되어 이후 [[삼국통일전쟁]]까지 이런 구도가 이어졌다. 어떻게 보면 삼국시대의 흐름을 바꾼 결정적인 사건이다. 성왕을 붙잡아 죽인 전공을 세운 장군 [[김무력]]은 이후 초고속 승진을 한 기록을 여럿 확인할 수 있다. 551년 [[단양 신라 적성비]]나 553년 7월 《삼국사기》의 신주 군주로 김무력을 임명할 때 김무력은 신라 17관등 가운데 여섯째 등급인 [[아찬]]이었는데, 555년 세워진 [[북한산 진흥왕 순수비]]나 561년 [[창녕 척경비]]에서는 3번째 등급인 [[잡찬]]으로 관등이 3등급 승진했다. 거의 약 2년 만에 3관등 승진인데 신라의 다른 기록을 봐도 이렇게 짧은 기간에 3단계 승진은 거의 사례를 찾아볼 수 없는 초고속 승진이다. 관산성 전투에서 활약한 전공을 인정받은 듯하다. 북한산 진흥왕 순수비는 교과서나 각종 시험 레벨에서는 555년 건립설이 정답이지만 학계에서는 555년설과 561년설, 568년설이 대립한다.[* 당연히 교과서와 시험에선 정답이 여러 개일 순 없으니 어지간하면 정설 하나만 제시한다. 그리고 진짜로 애매한 사례면 그냥 그 주제로 시험문제를 내지 않고, 내서 논란을 만들면 그건 좋지 않은 출제 예시다. 한 공무원 시험에서 북한산 순수비의 건립년도 문제가 나와 논란이 된 적이 있는데 국정교과서에 써 있는 555년이 정답으로 인정됐다. 그러니까 시험을 준비하는 사람이라면 그냥 555년 건립으로 알고 있는 것이 좋다.] 관련 논쟁은 해당 문서로. 아무튼 북한산 진흥왕 순수비를 제외하고 보더라도 창녕 척경비의 561년에도 잡찬이므로 8년 만에 3관등 승진라고 쳐도 상당히 빠른 승진임은 분명하다.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-BY-NC-SA 2.0 KR으로 배포하고,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.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.캡챠저장미리보기